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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활동/일기

2025년 5월 5일, 화요일

by 거스몽 2025.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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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5일, 화요일

조용한 봄날, 작은 일상

오늘은 봄비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창밖은 잔잔했고, 공기는 눅눅했다. 늘 그렇듯 아침은 내가 먼저 일어났다. 아내는 휴가를 냈다. 조금 늦게까지 자겠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주방으로 가서 커피를 내렸다. 요즘엔 케멕스에 다시 손이 간다. 원두는 엘살바도르 SHG, 부드러운 산미와 볶은 견과류의 잔향이 깔끔하다. 커피의 맛도 좋지만, 무엇보다 이 아침의 정적 속에 내리는 시간 자체가 좋다. 물줄기의 흐름을 지켜보는 일은 마음을 단정하게 만든다.

인터넷 신문을 대강 훑고, 투자 보고서를 살폈다. 지난달 편입한 유럽 부동산 리츠가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안정’이라는 단어가 주는 위안이 요즘처럼 중요한 시절도 드물다. 수익률보다 중요한 건 예측 가능한 흐름이다. 예전엔 더 높은 수익을 좇았는데, 요즘은 ‘지속 가능성’이란 말에 더 끌린다. 결국 삶도, 투자도 오래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된 걸까.

아내가 잠에서 깨어나 거실로 나왔다.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물을 찾길래, 냉장고에서 레몬을 띄운 물을 따라주었다. “오늘 어디 나갈 거야?”라고 묻기에 “삼청동에서 점심 약속 있어”라고 대답했다. 특별한 의미는 없었지만,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은 데서 먹고 와”라고 했다. 그런 짧은 대화가 아내와 나 사이를 편안하게 이어주는 듯하다.

점심 약속은 오랜 친구 재희와였다.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요즘엔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본다. 예전엔 밤새워 놀던 사이였는데, 이제는 묵은지 김치찜 앞에서 인생의 진도를 나누는 사이다. 그는 요즘 ‘시간의 쓰임새’에 대해 고민한다고 했다. 남는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제대로 써보고 싶다고. 나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는 신호겠지.

식사 후엔 북카페에 들렀다. 재희는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났고, 나는 잠시 더 머물렀다. 유리창 너머로 비가 흐르고 있었고, 안은 조용했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었다. ‘에세이로 읽는 일본 문학사’라는 책이었는데, 단정한 문장 안에 묘한 감정의 층위가 느껴졌다. 일본 문학은, ‘버티는 감정’에 익숙하다. 언뜻 조용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쉼 없이 흔들린다. 그런 문장을 읽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책을 몇 권 챙겨 나오니, 직원이 단골이라고 추천 도서를 슬쩍 넣어주었다. 집엔 이미 책이 넘치지만, 이상하게 책만큼은 쌓이는 게 반갑다. 서재는 점점 비좁아지지만, 책이 들어올 땐 오히려 공간이 살아나는 기분이다. 삶의 밀도를 채워주는 건 결국 그런 작은 것들 아닐까.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책을 몇 권 건네주며 “이건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골랐어”라고 하니, 아내는 슬며시 웃었다. 그런 웃음 하나가 오늘 같은 날엔 가장 큰 위로다.

잠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요즘은 쇼팽 녹턴을 연습하고 있다. 여전히 왼손이 불안정하지만, 조율해 가는 그 과정이 좋다. 음악은 결과보다도 흐름이 중요하다. 서툰 손끝에서라도 감정이 흐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저녁은 간단히 해산물 스튜를 끓였다. 냉장고에 있던 가리비와 방풍나물, 홍합을 넣고 조심스레 끓였더니 향이 꽤 괜찮았다. 아내가 와인을 꺼냈다. 지난 주말 압구정에서 샀던 부르고뉴 피노누아였다. “혼자 마시면 맛없잖아,” 하며 웃는 그녀 덕분에 식탁은 한층 따뜻해졌다.

식사 후엔 둘이 미호천을 걸었다. 우리는 말없이 걸을 때가 많다. 서로 말이 필요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건, 어쩌면 꽤 오래 함께했다는 뜻일지도. 물가에 비친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아내가 말했다. “요즘엔 조용한 시간이 좋아.” 나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요란한 걸 좋아했는데, 이제는 고요한 것들이 마음을 오래 끈다.

가끔 친구들이 묻는다. “넌 왜 이렇게 여유 있어 보이냐?”고. 대답은 늘 똑같다. “바쁘게 안 사는 연습을 조금 오래 했을 뿐이야.” 사실 여유는 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 조급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 그리고 그걸 함께 나눌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서 온다.

밤이 깊어간다. 아내는 거실 소파에서 독서 중이다. 나는 작은 조명 아래에서 이 일기를 쓴다. 곧 불을 끄고 향초 하나 켜둘 예정이다. 오늘은 프랑킨센스. 약간의 시더우드 향이 깔리는 이 조합은 밤에 특히 잘 어울린다.

내일은 오전에 현대미술관에 들러볼 생각이다. 작지만 단단한 전시가 열린다고 한다. 오후엔 시간이 된다면 부강 쪽 가죽 소파 매장에 가볼까 싶다. 요즘엔 오래된 것들에 마음이 간다. 반짝이지는 않지만 오래 남는 것들. 손때 묻은 가구처럼, 삶도 그렇게 깊어지고 싶다.

누가 이 일기를 볼 일은 없겠지만, 언젠가 지금 이 날들을 내가 잊어버릴까봐 적어둔다. 하루하루를 온전히 기억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이렇게 기록이라도 남겨두고 싶다. 그런 마음이 어쩌면 조금의 사치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렇게 흘러갔다. 조용히, 그러나 결코 헛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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