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이 만들어낸 곶감
아침 햇살이 따끈하게 비치는 날이었다. 문 앞을 열었더니 엄마가 어느새 현관 앞에 작은 비닐봉지를 놓고 사라져 있었다.
“아들, 나 왔다 갔다~ 냉장고에 넣어라~”
문자 한 줄이 전부였다.
봉지를 열어보니 새콤한 향과 함께 주황빛 곶감이 소복하게 담겨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예전엔 곶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뭔가 어른들 간식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곶감의 색이 유난히 따뜻해 보였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꼭 ‘오늘은 나를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 입.
그리고 바로 멈춰 섰다.
그 순간은 정말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진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 이게… 진짜 곶감이구나.’
달달함이 아니라, 깊은 단맛.
말랑함이 아니라, 곶감만의 밀도 있는 쫀득함.
그리고 입 안에서 퍼지는 묘하게 차분하고 따뜻한 향기.
평소 아무 생각 없이 먹던 과일 하나가 이렇게 사람을 멍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생각해 보니, 곶감 하나에는 ‘시간’이 들어 있었다.
감이 나무에 매달려 있던 시간, 따뜻한 가을바람이 스쳐 지나간 시간, 그리고 천천히 말라가며 단맛이 응축된 시간.
엄마가 골라서 말려두고, 또 챙겨서 들고 오기까지의 시간까지.
한 입 베어 물고 난 뒤 갑자기 그 모든 시간이 혀끝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는지, 갑자기 좀 울컥했다.
사실 요즘은 뭐든 빠르고 편리한 게 최고라고 느껴지곤 했다. 즉석식품, 배달, 전자레인지 1분.
그런 걸로 하루를 채우다 보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음식이 얼마나 특별한지 잊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곶감은 아무리 서두른다고 만들어지지 않는 음식이다.
천천히 말라야 하고, 바람을 맞아야 하고, 묶여 있어야 하고, 시간이 쌓여야 비로소 제 맛을 낸다.
엄마가 문 앞에 조용히 두고 간 곶감 한 봉지에는 어쩌면 그런 메시지가 들어 있었던 건 아닐까.
“야, 가끔은 천천히 좀 살아라.”
“너도 시간을 좀 말려라.”
“아들, 몸 좀 챙겨라.”
그렇게 혼자 해석하니 또 괜히 웃음도 나왔다.
곶감을 하나 더 꺼내 입에 넣으며 생각해 봤다.
내가 지금까지 먹던 건 그냥 ‘말린 감’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고, 오늘 먹은 건 ‘엄마의 시간’이 담긴 곶감이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세 번째 곶감을 집어 들었을 때, 중간에 아주 작은 씨가 하나 딱 나왔다.
원래 곶감에는 씨가 많지 않다. 요즘엔 씨 없는 감으로 만들기도 하고.
근데 그 씨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작은 행운을 찾은 느낌이 들었다.
어릴 때는 탱자나 감나무 열매 속에서 씨가 나오면
“이 씨 심으면 우리 집에도 감나무 생기는 거야?”
며칠을 설레며 묻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그 작은 씨앗 하나를 괜히 버리지 못하고, 그냥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멍하니 그걸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거, 한번 심어볼까?”
아마 금방 까먹고 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짜로 작은 감나무 하나쯤 키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만약 그 나무가 자라서 언젠가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로 곶감을 만들고, 그 곶감을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사람도 오늘의 나처럼 잠시나마 발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곶감 하나 먹었을 뿐인데, 이렇게 여러 생각을 하게 되다니 나도 웃기긴 하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사소하고도 느린 경험이 사람 마음을 움직일 때가 있다.
요즘은 다 빠르고 다 바쁘다.
그래서일까.
이 조그마한 곶감 한 그릇이 주는 감동이 더 크게 와닿았다.
엄마가 주는 음식이 그래서 무섭다.
맛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이유’가 들어 있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어떤 마음 같은 것들.
나는 결국 그날 받은 곶감을 혼자 다 먹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남았을 때, 괜히 아까워서 냉동실에 넣었다.
이건 다음 번에 기분이 정말 다운될 때 꺼내 먹을 생각이다.
엄마의 시간을 다시 씹어먹기 위해서.
곶감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다.
누군가의 손길, 누군가의 마음, 누군가가 보낸 ‘시간’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이야기다.
오늘 내가 먹은 곶감은 엄마가 건넨 이야기였고,
나는 그 이야기를 아주 천천히, 그리고 깊게 음미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
나는 곶감 때문에 잠시 멍해졌고,
조금 울컥했고,
조금 치유됐고,
그리고 아주 작은 새로운 꿈 하나를 갖게 되었다.
감나무를 하나 심어보겠다는 작은 꿈.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도 곶감 하나 먹게 된다면,
그냥 말라붙은 과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한 번 천천히 씹어보길 바란다.
그 속에 담긴 시간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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